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하라 츄야 (문단 편집) == 인간 관계 == 짧은 생을 살았고 단 두 권의 시집을 남겼을 뿐이지만 근현대 일본 문단의 거물들 상당수와 지인 관계였으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강렬한 개성과 안하무인 등에 대한 증언들을 남기고 있다. 나카하라 츄야의 인간 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예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와 연극 배우 하세가와 야스코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삼각관계다. 1923년 교토에서 리츠메이칸 중학교를 다니던 16살의 나카하라는 3살 연상의 하세가와 야스코를 만나 반하여 이듬해부터 동거에 들어간다. 한동안 잘 지내던 두 사람이었지만 1925년에 도미나가 타로가 소개한 도쿄제국대학 불문학과 1학년이었고 나카하라보다 5살 연상이었던 고바야시 히데오가 끼어들면서 파탄나게 된다. 하세가와와 고바야시는 눈이 맞아서 결국 하세가와는 나카하라에게서 떠나 고바야시와 동거하게 된다. 그런데 이후에도 나카하라와 고바야시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우선 하세가와는 상당한 결벽증이었던 모양이어서 고바야시는 그녀에게 염증을 느끼게 됐고 결국 3년 후인 1928년에 그녀 곁을 떠난다. 이후로도 고바야시는 일본 근현대 문학이론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유명 문예지 <문학계>를 창간하고 거기에 나카하라의 시를 여러 편 실어주는 등 여러 모로 도움을 줬다. 결정적으로 나카하라는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 시집인 <지난 날의 노래>의 출간을 고바야시에게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두 사람의 복잡하면서도 동지애적인 관계는 이후 고바야시가 나카하라를 추억하며 쓴 몇 편의 산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카하라와 하세가와 사이의 관계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역에 있다. 그는 하세가와가 자신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그녀를 못 잊어서 그녀에 관한 시를 쓰고 그 시를 <염소의 노래>에 수록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그녀가 나카하라도 고바야시도 아닌 연극 감독의 애를 얼결에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놀아준 사람이 나카하라 본인이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와는 사이가 나빴다. 서로 푸른 고등어(青鯖)[* 다자이 오사무의 별명.]니 민달팽이(ナメクジ)[* 나카하라 츄야의 별명.]니 하며 까댔을 정도. 나카하라는 술에 취하면 다자이의 집에 찾아와 문을 발로 차면서 '바보! 바보!(バカ)'라며 괴롭혔고, 다자이는 이불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나카하라의 사후 다자이는 "죽고 나서 보니 역시 나카하라다. 격이 다르다"며 그의 재능을 아까워 했다고 한다. --츤데레-- [[사카구치 안고]]와는 한 번 싸운 후에 친해졌다고 한다. 같은 술집을 다녔는데 마음에 들어하던 종업원과 사카구치가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화가 나서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그 당시 사카구치가 나카하라보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쫄아서 못 덤벼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시인이자 동화작가였던 [[미야자와 겐지]]는 존경했다. 겐지의 대표 시집 <봄과 수라>를 오래 탐독한 것으로 유명하며 재평가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영향받은 시도 썼다. 전후문학의 거장인 오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 츄야와 함께 동인지 <백치군>을 창간했었다.[* <염소의 노래>에 실린 시 상당수가 이 잡지에서 발표됐다.] 그리고 첫 소설이자 대표작 <포로기>에서는 나카하라를 '현대 일본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했으며 전후에는 나카하라 츄야의 시전집을 자신의 연구에 기초하여 편집하여 출간했다. 1974년에는 아예 나카하라 츄야의 전기를 써서 발표한다. 이 전기로 그는 노마문예상을 수상했다. ~~성공한 빠돌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